6.25전쟁 중 미군과 UN군이 먼저 파견되었으나 전열을 가다듬고 정비하느라 낙동강까지 밀렸습니다.
질문자님, 낙동강 방어선 작전은1950년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일대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진을 막아낸 전투를 말합니다.
북한 공산군의 남침 1개월이 되는 1950년 7월 말에 공산군은 영덕과 안동 및 상주와 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는 가운데 8월 초 낙동강선까지 물러나서 '부산교두보'라고 불리는 동남부 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방어선은 동서 80㎞, 남북 160㎞로, 서북 첨단의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남강과의 합류 지점인 남지읍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를 거쳐 진해만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이 방어선 안의 지역은 연합군의 보급기지인 부산에서 마산과 대구 및 영천과 포항 등의 전방지역에 이르는 방사형의 병참선이 발달되어 보급과 병력 이동에 유리했고, 기동예비대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자재로 투입하여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MacArthur,D.)의 명령에 따라 미8군 공병참모인 데이비드슨(Davidson,G.H.)이 경상남북도 경계를 이루는 산맥과 밀양 북쪽의 유천, 그리고 그 서쪽의 무안리를 거쳐 마산 동쪽의 고지들로 이어지는 총 길이 90㎞의 '데이비드슨선'을 구상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를 완료하였습니다.
질문자님, 이 때부터 국군과 미군은 작전 책임구역을 분담,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아 전쟁 발발 이래 처음으로 어깨를 잇댄 연결전선을 형성하였습니다.
창녕에서 남지 사이에 형성된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미 제24사단이 북한 공산군 제4사단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대구 서남에서 동북쪽에 이르는 외곽 전선에서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 공산군 수개 사단의 공격을 차단하였습니다.
질문자님, 포항과 안강을 잇는 동부 전선에서는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며 북한 공산군의 전선 돌파를 분쇄하였고,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는 국군 제1사단이 북한 공산군의 3개 사단을 저지하는 '다부동전투'를 벌였습니다.
9월에 들어서서도 북한 공산군은 낙동강의 모든 전선에 걸쳐 맹렬한 공세를 취했으며, 특히 영천 일대에서는 북한 공산군 제15사단이 국군의 전선을 뚫고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8사단은 제2군단 예하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를 섬멸함으로써 개전 이래 가장 큰 전승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은 결국 북한 공산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 반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북한 공산군의 주력을 무찌르고 6.25전쟁 발발 이래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낙동강방어선전투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2546
낙동강 방어선 형성기의 1950년 7월말에 공산군이 영덕과 안동 및 상주와 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자, 국군과 유엔군이 지연작전을 펴는 가운데 8월초 낙동강선까지 물러나서 '부산교두보'라고 불리는 동남부 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하고 북한공산군의 남진을 막아내던 당시의 전투 상황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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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님, 다부동전투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동일대에서 있었던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의 하나입니다.
1950년 8월 3일부터 시작된 북한공산군의 낙동강전선에서의 공격은 대구를 주목표로 하여 2개사단의 병력으로 대구 서남쪽과 서북쪽을 위협하였습니다.
질문자님, 왜관 북쪽에서 낙동강을 넘어온 북한공산군 1사단과 13사단 및 45사단의 3개 사단은 8월 14일부터 대구분지의 북쪽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수암산과 유학산 등의 고지를 공격하였는데, 이 지역의 방어를 맡고 있던 국군 제1사단은 험한 지세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전선을 고수하였습니다.
이 때 다부동일대의 협곡에서는 일곱 차례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북한공산군의 주력부대에 타격을 가하여, 8월 24일을 넘어서면서 북한공산군의 공세는 누그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갑사단은 대구의 북쪽과 서쪽에서 철통 같은 방어태세를 유지하였습니다.
1981년 정부는 유학산 기슭의 다부동에 전적비를 세워 국군 제1사단의 전공을 길이 증언하게 하였습니다.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4210
다부동전투전적비입니다.
질문자님, 영천전투는 1950년 6.25 당시 국군 제2군단이 영천지역으로 침공한 북한 공산군을 격퇴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입니다.
영천은 대구 동쪽 34㎞ 지점에 위치한 요충지로서, 만일 영천이 돌파되면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이 분리되고 포항∼대구간 횡적 병참선이 차단되며 영천으로부터 대구 또는 경주로의 돌파구가 형성되어 한미연합군의 낙동강 방어선이 큰 위협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공산군은 제15사단을 주축으로 한 5개 연대병력을 투입하여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간에 걸쳐서 경상북도 영천지역의 한국군 제2군단을 집중공격하였습니다.
이 교전에서 한국군 제2군단은 제8사단을 주축으로 한 7개 연대병력으로 이와 맞섰으나 초전에 영천지역을 빼앗기고 금호강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한국군은 9월 6일부터 8일까지 전열을 정비한 뒤, 미군전차의 지원하에 10일부터 13일까지 4일 동안 일대반격전을 전개하여 영천지역으로 침투한 북한공산군 제15사단의 주력을 격멸하고 영천을 탈환하였습니다.
영천탈환을 계기로 한국군은 낙동강전선의 동반부를 방어하는 데 성공한 반면, 북한공산군은 좌우인접사단과 측방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어, 신령방면에서 대구지역으로 공격한 북한공산군 제8사단의 공격이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전반적인 작전에 차질을 빚어 9월공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부터 6.25 전쟁의 전세가 역전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영천전투전승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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