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역사 이야기 블로그 입니다

  • 홈
  • 태그
  • 미디어로그
  • 위치로그
  • 방명록

'한국의 역사'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09.11 1910년~1940년 대해서
  2. 2013.09.09 한국의 역사- 연대표 작성하기
  3. 2013.09.05 한국의 역사 독립 시위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4. 2013.09.05 한국의 역사 간략하게 설명 드립니다
근대2013. 9. 11. 14:23

1910년~1940년 대해서

1910년~1940년 한국의 역사

 

1910년대의 국외 독립운동

 

 국외 독립운동은 1910년을 전후하여 간도, 만주, 연해주, 중국본토,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

 

 우선 간도지방은 "북간도"와 "서간도"로 나눌수 있다.

서간도에서는 1907년 윤치호, 안창호 등에 의해 창설된 "신민회"의 근거지인 "삼원보"를 중심으로 삼원보의 결속을 돈독히 하는 "경학사"로 시작된다. 이후 "경학사"가 확대 개편되어 "부민단"을 형성하고, "부민단"에서 독립군양성을 위한 "신흥학교"를 건립한다. 그리고 이 "신흥학교"가 훗날 무장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로 확대 개편된다. "부민단"의 확대 개편으로 "한족회"를 결성하고, "한족회"아래에 "서로군정서" 라는 군부대를 두어 "지청천"장군이 이를 통솔하였다.

 

 또한 북간도 "왕청"에 "대종교(단군을 교주로 모시는 나철, 오기호 등이 만든 종교)"신자들을 중심으로 "중광단"이 만들어지고, 그 아래 "김좌진" 장군을 대장으로 하는 "북로군정서"를 편성하여 1920년대 "청산리대첩"을 이끌게 된다. 또한 "용정"에 "서전서숙",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연길"에 "간민회"를 형성한다. 그리고 "간민회"를 확대 개편하여 "대한국민회"를 결성하고 그 아래 "국민회군(총대장-안무)"을 두어 1920년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 해외로 망명한 민족 지도자들은 재외 교민을 대상으로 "애국계몽운동"과 "언론활동"을 전개하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연해주에서 "신한촌"이 형성되어 한인들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였으며, "성명회"와 "권업회"를 통해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었다. 또한 "한민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이상설" "이동휘"등은 "대한광복군정부"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거쳐 1920년대 "대한국민의회"를 형성한다.

 

 중국 본토에서의 민족운동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많은 인사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문(쑨원)"을 비롯한 혁명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한.중 유대 강화에 힘썼다. "신규식"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친분이 있던 "손문"의 "국민당"정부를 돕게된다. 이후 신규식 선생은 "손문"의 지원을 받아 "동제사"를 결성하고 1918년 "동제사"를 확대 개편한 "신한동제사"를 거쳐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였다. "신한청년당"은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김규식"선생을 대표로 파견하여 외교독립활동을 추진하였다.

 

 이무렵 미주 지역에서는 19c 후반부터 한국인 이민자 수가 증가하게되자 이를 기반으로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 민족운동 단체가 설립되게 된다. 먼저 하와이 "호를룰루"에서 "신민회"가 결성되면서 부터 "흥사단"을 비록한 수만은 단체가 결성되었고, 1907년 여러단체들이 연합하여 하와이에 "한인합성회"를 조직하였다. 미국본토에서도 안창호의 지도로 "샌프란시스코"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전명훈"과 "장인환"이 "스티븐슨"을 암살한 뒤로 미주에서의 활동이 활발해져 미국본토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회"와 "공립협회"가 결합하여 "국민회"를  조직하였고 그후 "대동보국회"가 참가하여 단체를 "대한인국민회"로 확돼 개편 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미국본토에 "북미 지방총회", 하와이에 "하와이 지방총회", 멕시코에 "맥시코 지방총회"를 설치 하였고 그후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연해주 지방총회"를 산하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두고 4개의 지방총회와, 116개의 지방회를 설치 하였다.그리고 "신한민보"를 발간하여 세계의 민족운동 진행상황을 알렸으며, 각지에서 군사단체가 조직되어 군사훈련을 시행하였다. 대표적인 군사단체로 "의용훈련대"와 "청년, 소년병 학원"등이 있으며, 멕시코에서 숭무학교가 설립되어 군사훈련을 실시 하였다.

 

 

 

 1910년대 국 내.외의 독립운동은 1920~40년대 무장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35년간 일제치하로 부터의 독립에 기본 배경이 된 운동이었다.

 

'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전쟁 중 미군과 UN군이 먼저 파견되었으나 전열을 가다듬고 정비하느라 낙동강까지 밀렸습니다  (0) 2013.09.11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통치기구의 변화입니다.  (0) 2013.09.11
Posted by 원주유
한국의역사2013. 9. 9. 17:07

한국의 역사- 연대표 작성하기

한국의 역사- 연대표 작성하기

위에서 부터 순서대로 적겠습니다.
석기시대(구석기,중석기,신석기)
(8000)
(2333)
청동기보급(10세기)
철기보급(4세기)
(고구려) (발해)
기원전37년 기원후668
(후백제)
(백제)
(신라)
(고려)
(조선) 1392-1910
청동기와 철기 보급은 연도는 모르겟고 몇세기라고만 알아서 적었음.

동이족 문화권과 고조선

청동기를 사용하던 민무늬토기인들이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데, 이들은 중국의 선진문헌(先秦文獻)에 나타나는 동이족(東夷族)으로 알려졌다. 동이족은 당시 화이허강[淮河(회하)] 이북의 연해 일대인 장쑤성[江蘇省(강소성)]·안후이성[安徽省(안휘성)]의 일부에서 산둥성[山東省(산동성)]·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을 거쳐, 보하이만을 포함한 랴오허강 유역과 만주지역에 살았던 민족의 총칭이었다.

동이족은 중국 북서지역에서부터, 한 갈래는 만주 남동부와 한반도로, 다른 한 갈래는 허베이·산둥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산둥 방면의 동이는 은대(殷代)로부터 한족(漢族)과 끊임없는 접촉과 투쟁을 벌였고, 주대(周代)에는 화이허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대연합세력을 이룬 것 같다.

그러나 이 지역 동이족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정책에 따라 한족(漢族)에게 점차 동화·정복되거나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동이족은 한(韓)·예맥족으로 일컬어졌고, 몇 차례 민족이동을 계속하면서 중국 동북지방(만주), 한반도 등지에 우수한 청동기문화를 이룩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사에는 최초의 국가형태를 갖춘 고조선(古朝鮮)이 등장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BC 2333년경에 단군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에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에 관한 내용이 너무 간략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고조선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기록이 상당히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의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BC 1200년경 기자(箕子)시대 고조선에 <8조 금법(禁法)>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시기에 법률이 있었다면 고조선이 고대 국가체제를 갖춘 것은 그보다 앞선 시대로 추정된다. 또 최근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한민족의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시기가 BC 24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의 고조선 건국시기와 비슷하며, 청동기시대에 대체로 국가사회 단계에 진입하였다는 일반론을 따르면 BC 2333년경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타당한 근거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는 신화가 실려 있다. 즉, 제석천(帝釋天)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풍백·우사·운사 등을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를 베풀고 인간사회의 여러 가지 일을 교화하다가 뒤에 곰의 화신인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았다.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堯)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을 건국, 아사달에 도읍하였다고 한다.

이 단군신화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데, 즉 부족의 시조를 하느님의 손자에 비유하는 천신사상, 제사장인 단군과 정치의 수장인 왕검의 동시사용으로 나타나는 제정일치사회, 단군의 어머니를 곰에 비유하는 곰 토템 씨족설, 풍백·우사·운사 설화에 보이는 원시농경사회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숭배신앙은 신석기시대에서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천신사상과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철기문화의 전래와 위만조선

고조선의 청동기문화는 BC 400년경에 이르면 세형동검을 특징으로 하는 후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철기가 보편화된 때이므로 실제로는 청동기시대를 지나 철기시대에 진입한 후가 된다. 세형동검은 무기로서의 실용성과 조형적 예술성이 잘 조화를 이룬 우수한 공예품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청동기와 세형동모는 기술면에서 세형동검과 공통성이 있는 것으로 고조선의 특징적인 무기이다.

고조선에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BC 8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널리 보급된 것은 BC 500년경이고 BC 300년경에 이르면 보편화되었다. BC 300년경 유적에서는 긴검·단검·창·가지창·과 등의 무기류와 괭이·호미·낫·반달칼 등의 농구류, 도끼·자귀·끌·손칼·송곳 등의 공구류가 출토되어 당시에 다양한 철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금속문화의 전래는 생활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가옥은 움집에 온돌장치를 한 가옥이 나타났고 또한 지상에 목조가옥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철기인들은 새로운 무기와 농구를 사용함으로써 종래의 고인돌인[支石墓人(지석묘인)]을 손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이 금속문화는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토착화로 이어졌다.

이로써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중국 유이민과 토착민과의 연합정권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성립되었다. 즉 위만조선은 중국인 이주자들에 의한 식민정권이라기보다는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이(流移) 동이계 한인(韓人)과 토착 조선인의 연합정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군현

고조선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한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아 BC 108년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자리에 낙랑(樂浪)·진번(眞番)·현도·임둔(臨屯)의 4군을 설치하여 중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낙랑군 이외 3군은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었으나 낙랑군만은 후대의 4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그 사이 3세기 초에는 낙랑군의 남부에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었다. 낙랑과 대방 2군은 중국 역대왕조의 동방지배 거점이 되었다.

군현 설치 이후 중국 지배에 대해 한국 민족은 항전을 시작하였다. 선봉장격인 고구려는 부여족의 일파로서 압록강 중류역을 중심으로 기원 전후에 왕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 역대 왕조와 악전고투를 거듭하였고 또 주변 여러 종족을 정복하면서 4세기 초 낙랑군을 아울렀으며 계속해서 대방군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약 400년간 지속된 중국의 한국 일부지역에 대한 지배는 끝났고, 고구려는 만주에서 한국 북부에 이르는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건국연대로부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 삼국이 고대왕권의 기반을 형성한 것은 고구려는 6대 태조왕 때, 백제는 8대 고이왕 때이고, 신라는 17대 내물마립간 때부터이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불린다. 원삼국시대 이래 철기문화의 급속한 보급은 어로·목축과 함께 농경생활의 능력과 군사능력을 크게 발달시켰다. 이것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부족통합을 촉진하였고, 밖으로는 중국의 식민지세력과 충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고대왕권의 성립과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교통요충지에서 성장하며 태조왕 때 동해안지역에 진출하였고 청천강 상류지역을 확보하면서 계속해서 랴오둥지방으로 진출했다. 미천왕 12년(311)에는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였고, 중국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약 100년 늦은 고이왕 때부터 고대국가체제로 발전하였는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중국식민세력과의 힘든 대결을 겪었다. 반면에 3세기 초부터 가야 등 주변세력들과 대항하는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고 있던 신라는 낙랑군과 연결된 부족들, 가야의 지배하에서 조종을 받던 왜(倭) 및 한강 상류지역을 개척하고 있던 백제 등과 빈번한 충돌을 하면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삼국은 각각 중국의 제도·문화를 흡수하여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서로 경쟁하였다. 그 가운데 고구려의 광개토왕(재위 391~413)은 신라를 복속시키고 백제를 공격했으며, 중국과 교전하여 광대한 왕국을 세웠다. 그 뒤 장수왕은 도읍을 압록강 중류지역에 있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吉林省(길림성)] 지안현[輯安縣(집안현)]인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겨(427)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산성(漢山城)을 빼앗긴 뒤 도읍을 웅주(熊州)로 옮겼고(475), 다시 사비성으로 옮겼다(538). 또 왜와 연맹하여 고구려·신라와 대항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가야연맹을 병합한 뒤, 한강 하류를 장악하고서 화전(和戰) 양면책을 구사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다.

삼국의 관등조직은 고구려 14등급, 백제 16등급, 신라 17등급으로 조직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불교의 전래로 부족국가시대에 비하여 크게 확대되고 복잡해진 고대사회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철학을 제시하는 한편 고도의 다양한 불교문화·예술을 꽃피워 삼국의 고대문화 발전의 길잡이가 되었다. 또 한문학이 수입되어 학문수준이 고양되었으며, 이와 같은 문화축적은 후진국 일본을 교화시키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와 발해

삼국이 항쟁하며 발전한 4~6세기에 걸친 시기에 중국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남북조(南北朝)의 혼란기로서 한국에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6세기 말에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그 힘은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수는 7세기 초 3번에 걸쳐 고구려에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분투로 패퇴하였고, 4번째 침공을 계획하던 중에 자국내의 농민반란으로 인하여 멸망하였다(618).

당(唐)도 7세기 중기에 몇 차례나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고구려의 반격에 굴복하였다. 이에 당은 작전을 바꾸어, 바다 건너 백제를 침공하였다. 이 때, 신라는 숙적을 물리치기 위해 당과 연합하며, 나·당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무너뜨렸고, 또 백제를 원조하기 위해 온 일본군을 백촌강(白村江)에서 대파하였다(663). 뒤이어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내부 균열이 생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땅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했으나, 당의 한반도 점령에 반대한 신라와 6년간(671~676) 전쟁을 벌인 끝에 패퇴하였다.

당의 철수에 따라 신라는 한반도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이 광대한 국토를 지배하기 위해 신라는 율령제도(律令制度)를 채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건설을 이루었다. 집사부(執事部)·조부(調部)·창부(倉部)·예부(禮部) 등의 중앙관청, 9주 5소경 및 군현 등의 지방통치기구, 9서당(九誓幢) 10정(十停)의 군사조직 등을 7세기 말까지 정비했다. 왕족·귀족은 골품제로 특권을 유지했으며, 그들이 거주한 수도 경주에는 전국으로부터 공물이 들어왔다. 경주 주변에 남아 있는 사원·불상·동종과 고분으로부터의 출토품 등은 당시의 영화를 보여준다.

한편 멸망한 고구려지역과 한반도를 경영하기 위해 당이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신성(新城)으로 옮겨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만을 통치하게 된 지 20여 년 후 중국은 안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전횡과 밖으로 거란족(契丹族) 이진충(李盡忠)의 난이 일어나 내우외환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좋은 기회에 고구려 별부(別部) 출신으로 알려진 대조영(大祚榮)이 다수의 말갈족(靺鞨族) 세력을 규합하고 지금의 지린성 둔화현[敦化縣(돈화현)] 밖에 성을 쌓고 건국의 터전을 쌓은 뒤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을 칭하였다. 곧 698년 발해(渤海)의 건국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선진 중국문물을 흡수하여 대규모의 짜임새 있는 수도를 건설했다. 최근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을 보면 불교문화가 꽤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는 시라무렌강[西喇木倫(서라목륜)]에서 흥기하여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15대 22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918).


고려사회


고려왕조의 성립과 발전

신라 말 고려 초에 한국 고대사회는 중세사회로 큰 전환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역사는 한 민족 한 사회 안에서, 그리고 같은 지역 안에서 자기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중세문화를 성립시킴으로써 고대에서 중세로 계기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성취는 민족문화의 저변 확대와 민족문화 능력의 전체적 증대에서 온 것이었고, 보다 강력한 민족문화전통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중앙의 진골귀족(眞骨貴族) 중심이고, 수도 경주의 집중적인 고대문화에 반발하면서 성장한 지방호족이 주체세력이 되어 성립시킨 중세문화로서의 고려문화는 2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첫째로 고려문화는 안으로 신라시대의 고대문화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밖으로는 중국과 다른 성격의 전통과 사회기반 위에서 개성 있는 문화를 성립시켰다. 그런 까닭에 선진적인 송(宋)문화를 수입하면서도 모방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성격을 띠면서 독특한 개성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운영원리로서의 유교정치이념의 수립과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속장경 간행에서 볼 수 있는 국제적인 문화활동,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독창적인 선교(禪敎)통합사상체계의 수립 등에 나타난 새로운 문화능력의 발휘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둘째로 고대문화의 모순을 자체적으로 극복하였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문화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곧 새로운 문화의식을 토대로 보다 강력한 민족의 공동체의식을 성립시켰다. 태조 왕건(王建) 때 후백제와 연결된 거란(契丹)을 경계하고 거란에 망한 발해의 유민을 포섭하면서부터 북방의 유목민족이나 반농반목(半農半牧)의 민족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반농반목의 문화단계에 머물러 있던 거란의 침입에 대해서 자기 문화의 수호관념이 굳건하게 성립되어 있었고, 이러한 고려인의 문화의식과 민족의식은 대거란전쟁에서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이 전쟁에서 성공하여 거란의 팽창을 막은 것은 안으로 민족의 문화능력에 대해 더욱 자신을 갖게 하였고, 밖으로 고려·송·요(遼)가 정립하는 국제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여 문화의 발전을 한층 더 가속화하였다. 그 뒤에도 그러한 문화능력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유목민족인 몽골의 침입에 대항해서 30여 년에 걸친 항전을 전개하여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농민반란과 무인정권

12세기 이래 고려 정계에서는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지배체제는 동요되었다. 또 지방에서는 농민의 유랑과 반란이 일어났다. 그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그때까지 문신에게 업신여김을 받던 무신이 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였다(1170). 그 후 얼마간 무인 상호간의 권력투쟁이 계속되다가 1196년 최씨무인정권이 성립하였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외압과 몽골의 침입>10세기 말~11세기 초에 거란(遼), 12세기에는 여진(金), 13세기 이래 몽골(元)족의 침입을 받았다.

특히 몽골은 약 30년(1231~1259)에 걸쳐 고려 전토를 짓밟았다. 최씨무인정권은 완강히 항전하였으나, 화친을 주장한 문신파에게 무너졌다(1259). 이후 고려는 몽골의 제후나라로 전락하여 내정간섭을 받았고, 2차례의 일본원정에 참전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어 14세기가 되자 왜구(전기 왜구)가 내습하여 해안선뿐만 아니라 오지까지 황폐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환 중에서 토지는 소수의 권력자 손에 집중되었고, 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잃게 되었으며 관료 가운데에도 토지와 녹(祿)의 지급에서 누락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국의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가 한국인이 세웠던 한국의 역사임을 말해 보시오 (주장+근거)  (0) 2013.09.09
한국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 됬나요?  (0) 2013.09.05
한국의 역사에서 "왕족이 아닌 사람에 의해 " 대리청정이 이루어졌던 시기?  (0) 2013.09.05
중국의역사vs한국의역사 중국의역사가더 오래된나여?  (0) 2013.09.05
한국의 역사 간략하게 설명 드립니다  (0) 2013.09.05
Posted by 원주유
카테고리 없음2013. 9. 5. 14:38

한국의 역사 독립 시위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한국의 역사 독립 시위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독립시위를 하게 된 배경

 

나라를 잃어서 좋아할 사람은 없겠죠?

 

나라를 잃은 나라는  그 나라를 지배한 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것인데 그러면 나라를 잃은 나라의

 

국민은 인간으로의 대접을 상상도 못하죠 .. ..

 

나라를 사랑하고 또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당연히 나라를 다시 되찾고싶으니깐

 

독립시위를 하게 된것 같아요

 

누가 자기국민을 발로차고 고문하고 일만시키는데

 

평소 나쁜감정이 있던 사람이라도 그런 취급을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보다못한 국민끼리 조직을 결성하게 되고

 

또 독립시위를 하게된거죠....

 

[이부분은 인터넷을 찾아도 안나와서 제 생각으로

 

서술하였지만 도움이 조금이라도 될것같다는

 

생각으로 서술했습니다.]

 

물론 친일파도 있겠지만요-_-;;;  

 

3.1운동의 의의

 

* 자주 독립 국가임을 선포

* 우리 민족의 강력한 자주 독립 의지를 표출

* 다른 나라에서 한국 독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됨

Posted by 원주유
한국의역사2013. 9. 5. 14:36

한국의 역사 간략하게 설명 드립니다

한국의 역사 간략하게 설명 드립니다

 

고조선전 제외하고 말하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는 단군왕검 즉 동물의아들이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워서 수도를 아사달로 정하고 그리고 홍익인간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뒤 고조선이 멸망한뒤 삼국시대 고구려,신라,백제,가야가 탄생합니다.

삼국시대중 고구려는 가장 빨리 영토를 넓힌 나라로써 막강한 힘을 차지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의 반해 신라,백제,가야는 땅을 넓이지는 못하고 오히려 고구려에게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뒤 가야는 신라의 침입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전성기때 신라보다 많은 영토를 넓힐수있었죠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와백제의 기에 깔려도 신라는 전성기때와 지금까지 신라는 영토를 넓힐수있었던것은

삼국시대가 통일을 했다는것입니다.

드디어 막강한 고구려가 멸망하고 가야도 멸망하고 신라는 통일신라를 만들어서 새로운 출발을 힘썼습니다.

그런뒤 통일신라는 고려라는 나라로 바뀌어지고 그런다음 고구려의 후손들이 뭉쳐서 만든 나라가 발해입니다.

고려의 시조는 왕건이며 발해의시조는 대조영입니다.

고려는 팔만대장경판전,팔만대장경판까지만들면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알리는데에 고려의 문화재가 빠지면 서운합니다.

고려청자역시 고려인들의 멋등이 정말 담겨있는 문화재여서 정말 좋은문화재가 될수있습니다.

그의 반면 발해는역시 막강한 나라로써 땅을 넓히고 그리고 고려를 침입할려고 하였지만

서희의 담판에서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들이 만든나라여서 고려라 이름을 지었다는 말을하면서 말한마디로 발해의 침입을 막을수있었습니다.

 

그런뒤 마지막 공민왕때 이성계가 전투를 하려다 이성계는 드디어 분노를 삼키며 고려를 침입하고 드디어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조선은 백성들이 고려라는 나라라고 알고있어서 이성계는 또 한번 화가나서 조선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한양에 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2,3대 왕이 서서히 지난뒤 우리나라의 글을 만드신 유명한 분 바로 세종대왕님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셨습니다.

세종대왕때는 많은 학자들이 조선과학 기구를 만드는데 힘썼고또한 백성들을 위해 세종대왕님께서는 엄청난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뒤 조선은 점차 기울어 가던때가 바로 임진왜란때입니다.

임진왜란때는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거북선으로 인해 일본의 침략을 막고 그런뒤 이순신 장군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싸우신분이십니다.

그런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제 1대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이며

민주주의 국가로써 대한민국으로써 막강한 힘을 보여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의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연대표 작성하기  (0) 2013.09.09
한국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 됬나요?  (0) 2013.09.05
한국의 역사에서 "왕족이 아닌 사람에 의해 " 대리청정이 이루어졌던 시기?  (0) 2013.09.05
중국의역사vs한국의역사 중국의역사가더 오래된나여?  (0) 2013.09.05
고인돌 유적,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해인사 장경판전,창경궁에 대해서  (0) 2013.09.05
Posted by 원주유
«이전  1  다음»
태그 : 미디어로그 : 지역로그 : 방명록 : 관리자 : 글쓰기 Blog is powered by Daum / Designed by Tistory

RSS FEED
블로그 이미지
원주유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32)
한국의역사 (7)
백제 (4)
고구려 (3)
신라 (2)
고려 (6)
조선 (4)
근대 (3)
리뷰 (2)

공지사항

태그목록

  • 조선시대의 민화
  • 부여태후
  • 고려의 역사
  • 제6공화국
  • 한국의 역사
  • 고려시대
  • 고구려 전성기
  • 고구려
  • 신라 통일의 힘
  • 다부동전투전적비
  • 발해
  • 조선시대 신분
  • 발해역사인물
  • 고려역사인물
  • 신라의 흥망성쇠
  • 백제
  • 조선시대 임금
  • 영천전투전승비
  • 고구려 영토
  • 조선시대 도자기
  • 통일신라
  • 신라의 영광과 몰락
  • 고려
  • 공산군
  • 이제현
  • 고려 역사
  • 신라의 지리적 위치는
  • 조선시대 신분 제도
  • 드라마천추태후
  • 고려시대화폐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달력

« » 2025.6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링크

티스토리 홈 티스토리 가입하기

티스토리툴바